경주 홍상수와는 또 다른 장률의 인간과 관계 파헤치기

홍상수 영화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장률의 경주

다들 홍상수 감독의 영화인 줄 알았다는데, 과연 그런 면이 있었다. 특히, 백현진이 연기한 박교수는 딱 홍상수식 인물이었다. (백현진씨는 본격적으로 배우 겸업을 해도 좋을 만큼 자연스러우면서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그런데 다른 인물들은 홍상수 감독 스타일과는 많이 달랐다. 남다른 시각과 독특한 영화 문법으로 새롭게 일상을 보게 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부분이 많지만, 인물을 만들어내고 그 인물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에 있어서 두 감독은 차이가 많이 나는 것으로 느껴졌다. 홍상수 감독의 아류가 아닌, 장률 감독의 영화임이 더 반가웠다. 홍상수 감독의 팬임을 자처하기도 하지만, 난 장률 감독의 인물에 더 매력을 느꼈다. (홍상수 감독은 자기 인물에 매력을 강요하지 않는 매력이 있다.)

다른 겉과 속에 대한, 다른 접근

홍상수 감독이 겉보기 그럴싸해 보이는 인물들의 비열한 내면을 끝까지 추적해서 드러낸다면, 장률 감독은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안으로 곪아 있는 사람들의 내면을 따뜻한 시각으로 드러낸다. 겉과 속의 다름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파헤치는 의도와 목적이 다른 셈이다. 북경대 교수로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는 주인공 최현(박해일 분)이, 이 모든 게 다 똥같다고 털어놓는 장면에서 우린 겨우겨우 버티고 서 있는 우리 현실의 한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울고싶은데 뺨 때려줘서 울었더니, 비난한다. 최현은 입을 다문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라면, 인생은 너무 외롭고 쓸쓸하다. 성공과 인정도 행복을 가져다 주진 않는다.

춘화가 불러온 것들

박해일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빛난 주인공 최현은, 선배의 갑작스런 죽음에 문상을 갔다가 추억이 어려있는 경주로 향한다. 문득 생각난 춘화 한 점은 그의 내면에 설명할 수 없는 방아쇠를 당긴 것 같다. 선배와의 추억, 교감, 묘한 그림으로 더 신비롭게 기억에 남았을 카페 여주인, 동떨어진 시간과 공간, 그리고 젊음에의 동경 등이 그를 경주로 불렀다. 그의 경주행은 무엇을 찾아 떠난 것이기도 했지만, 그 무엇들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했다. 남부럽지 않은 환경 속에 곪아 있는 현실의 무게를 그는 똥이라는 단어로 표현해버린다.

인간은 누구나 벌거벗으면 초라한 존재

이제 뗄래야 뗄 수 없는 내 일부가 (아니면 내 전부가) 되어버린 똥같은 현실로부터 잠시나마 떠나 있고 싶어서 그는 경주에 왔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알아보고 두고 온 현실로 자꾸 다시 데려가는 박교수(백현진 분)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홍상수식 인물이었으면 카운터 펀치뿐 아니라 판을 엎었을텐데, 최교수는 잽만 하나 던지고 금방 수세에 다시 몰린다. 주연을 내려놓고 조연과 엑스트라를 자처하며 초라한 모습으로 지푸라기를 잡는다.

너무 완벽하게 통제하면 병이 되는, 내 안의 속물

찻집 여주인 공윤희(신민아 분)는 경주의 여신으로 불리지만, 남편의 자살로 인한 충격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는 인물이다. 신비함과 우울함으로 둘러싸인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겉으론 활기로운 여인이지만, 속은 외롭다. 최현에게 마음이 끌리는 공윤희는 계속 그를 초대한다. 서로 유혹하고 넘어가면서도 선에서 찰랑거리는 이 관계의 긴장감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 중 하나였다. 쉽지 않다. 인간은 모두 번지르한 겉모습 안에 비열하고 저속한 마음을 지니고 있지만, 그 속물이 나를 점령하도록 언제든지 풀어주지는 않는다. 그 내 안의 속물과 양보도 하고 타협도 하면서 공존한다. 장률 감독이 보여준 인물들은 그런 점에서, 홍상수식 인물들과는 달랐다.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이 뒤섞이는, 경주

천년고도 경주는 역사와 과거가 현재에 살아 있는 곳이다. 로마에서는 (혹은 파리에서는) 뭐든지 가능하다고 말하는 영화들처럼, 경주에서는 뭐든지 가능하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과거와 현재가 섞여 있고, 꿈들이 살아 있는 곳이다. 삶의 현장이 죽음의 현장들과 뒤섞인 곳이기도 하다. 7년 전 추억을 찾아 경주에 온 주인공은, 이곳에서 온갖 추억들을 현실화 한다. 경주는, 추억과 여행과 상상의 장소가 된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찰랑거린다. 내 안의 서로 다른 두 내면의 경계와, 인물들 간의 관계와 함께 여러 가지가 선을 넘나들며 출렁이고 찰랑거리는 재미에 빠져볼 수 있는 영화였다.

상상과 현실의 경계

판탄지와 현실이 섞인 이 영화 속에서 그 경계들을 구분지어 선으로 그어 뚜렷하게 만들어 보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고 생각된다. 능력도 안 된다. 느낌적 느낌으로는, 대개의 인물들이 첫 만남만 현실이 아닐까 생각해보긴 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죽은 선배의 부인, 찻집 여주인, 지나면서 우연히 만나는 모녀, 안내소 안내원 등 등장 인물들은 모두 현실에서 만난 사람들인 것 같고, 그들과의 단발적인 우연한 만남들은 꿈이나 상상 속에서 관계로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현실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반복되는 관계들로부터는 떠나고 싶고, 흘러 지나가버리는 새로운 만남들은 잡아두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 새로움으로 이 진부함들을 떨쳐버리고 싶은 것 아니었을까.

이성보다 감성으로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

나름대로 한번 생각해본 것일 뿐, 이렇다 저렇다 결론짓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 영화는 논리로 보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용히 이어지는 장면 장면의 느낌을 충만하게 즐길수록 영화는 재밌어 진다. 삶 속에 흘러가는 모든 인과 관계들을 들여다 봐도 해석이 안되는 게 인생인데, 단면만 보여지는 영화 속에서 어떤 결론과 해설을 모두 이끌어낸다는 건 무리한 일이다. 결과에는 설명할 수 있는 원인들이 있어야 한다고 믿고, 언제나 해석과 해설을 필요로 하는 이성적인 사람들에겐 뭐 이래, 하는 영화가 될 수 있겠다. (상상과 현실이 뒤섞이는 것 외에도 논리적인 접근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꽤 많다.) 감성적이고 감상적인 사람들은 즐겁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두만강을 재밌게 봤던 나는, 자기 색깔을 잃지 않고 변방에서 주류로 지평을 조금씩 넓혀가고 있는 장률 감독의 행보를 반가운 마음으로 지지하고 응원하고 있다.

PS. 춘화에 적혀 있던 “한 잔 하고 하세”, 삶의 여유와 해학이 느껴지는 정말 멋진 구절이었다. 하지만, 찻집 여주인은 그림과 그 구절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음담패설을 견뎌야 했을까. 오죽하면 벽지로 덮어버렸을까. 춘화를 좋아하면 변태이고, 춘화를 걸어놓은 여주인은 쉬운 여자인가?

PS. 이해 안 가는 장면 투성이지만,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게 여정(윤진서 분)의 등장과 퇴장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실제 인물인 여정은 영화 속에서는 다 상상 속의 만남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책임지지 못한 두고 온 기억에 대한 짐스런 마음, 책임을 강요하며 짓누르는 과거와 현재의 무게로부터 그는 도망치고 싶은 것 아닐까. 의처증은 의부증의 다른 이름, 다른 모습 아닐까. 과거의 연인과의 충돌이 아닌, 무의식과의 충돌이 아니었을까.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너무 난해하기만 한 영화를 좋아하진 않지만, 이렇게 결론 없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영화가 난 참 좋다.

경주

감독
장률
출연
박해일, 신민아, 윤진서, 김태훈
개봉
2013 대한민국
평점

리뷰보기

일시: 2014년 6월 22일 12시 35분

장소: 씨네큐브 광화문 (2관 56번)

동행: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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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경주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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