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한밤의 산행

아주 오래전 나를 문학의 심오한 세계로 이끈 책들은 한국단편문학들이었다. 배따라기, 감자, 발가락이 닮았네..등등.
주로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의 지식인들의 고뇌나 해방과 전쟁을 겪는 소시민들의 가난한 삶들이 펼쳐졌던 작품들이었다.
그 속에서 역사를 느꼈고 시대의 아픔을 간접으로 겪곤 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단편문학을 접하면 장편을 받아들었을 때보다
좀 더 숙연해지고 뭔가 공부를 한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다가오곤 한다.
어쩌면 이 책속의 작품을 썼던 작가들도 나와 비슷한 마음가짐이었을 것이다. 짧지만 진한 여운을 담은 작품을 쓰기위해 장편
못지 않은 가슴앓이를 하지 않았을까.
주로 2000년도 초에 등단한 작가들이니 조금은 신선하고 발랄할 것을 기대했는데 시대를 짚어내는 능력은 굳이 나이가 필요없는 듯하다.

아주 오래전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도 필리핀의 어느 섬 정글에서 30년이나 숨어 살았다는 일본 군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정용준의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그려진 작품인 듯 하다.
오노다중위는 전쟁이 끝나고도 오랫동안 섬의 동굴에 살아남은 군인들과 함께 그만의 전쟁을 치르고 살아왔다.
게중에는 질병으로 혹은 약탈중에 숨지기도 하지만 부하인 료우타와 끝까지 살아남았던 오우다는 사실 전쟁이 이미 끝났으니 투항하라는
방송조차 외면한 채 일본군의 정신을 잃지 않겠다는 맹목에 빠져 스스로 전쟁에 빠진 인물이다.
부하인 료우타가 결국 자유를 향해 세상밖으로 나가려하자 그를 죽이고 혼자만 살아남는다.
그런 그가 발견되고 일본으로 귀환하는 장면에서 맹신의 종교집단이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장면이 겹쳐온다.
오노다에게 전쟁은 하나의 종교였고 지키고자했던 신념은 교리와 다름 없는 것이 아닐까.
그의 맹목의 삶에서 안타까움보다는 어리석음과 일본인들의 저간에 숨겨져있는 폭력성이 그대로 느껴진다.

신라의 충신이었던 박제상과 쓰시마섬에서 흘러온 명화의 사랑이야기도 애틋하다.
조영석의 ‘추구’에서는 몰락해가는 왕가의 충신으로서의 고뇌와 자신의 곁을 맴도는 명화를 받아들여야하는지 밀쳐내야 하는지
망설이는 사내의 심정이 잔잔하다. 짦은 작품이지만 과거의 어느 한 시절을 되살려내는 능력이나 고어들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명화가 있는 섬에 다시 이르지 못한 제상과 그를 사모하여 섬을 떠나 그에게 향하는 명화의 마지막 모습이 인상깊다.

조수경의 ‘내 사람이여’는 다소 통속적인 내용이긴 했지만 쉽게 읽혀졌던 것은 가장 실제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방송국 PD와 작가의 불륜을 소재로 아내인 영주와 상간녀 유경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펼쳐지는 이 작품은 두 여자 사이를 오가는
남자가 어느 날 교통사고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되고 그 죽음에 두 여자의 인과관계과 밝혀진다.
연극 작품을 한 편 보고난 느낌이랄까. 자신을 사랑하지만 항상 아내에게 되돌아가야하는 남자의 등을 보면서 질투에 휩싸이는 여자
유경은 남자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남자는 괴로움에 못이겨 술을 마신 채 운전을 하게 된다.
바로 그날 남자의 사망소식이 들리고 유경은 혹시 자신이 그를 떠나보내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에 휩싸인다.
아내인 영주는 어느 날부터인가 남편에게 여자가 있음을 짐작하고 뒤를 쫓게되는데..
남편의 유품에서 발견된 사진기속에 담긴 필림을 현상하러 사진관으로 간 영주는 남편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혼자 가슴에 묻은 채
사진관으로 급히 현상해 달라던 사진을 찾으러 가는 것으로 끝난다.
짧은 작품이지만 두 여자의 심리적 묘사가 뛰어났고 심지어 남편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복선에 까는 치밀함마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마치 잘 차려진 뷔페식당에 온 것처럼 역량과 개성이 다른 작가의 모음집을 접하는 일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가끔은 너무 심오한 작품이라 몇 번을 되새기며 읽어야 하는 당황스런 순간을 맞기도 하지만 슬쩍 넘어가보려는 얕은 수를 헤아리는
작가의 부비트랩인듯 고까와하지 않기로 한다.
든든히 차려입고 나선 한밤의 산행에서 정상을 잘 찍고 내려온 뿌듯함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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