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여자친구를 잊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최형에게

양수리 버스 종점에서 북한강을 왼쪽에 끼고 달리다 보면 에쿠스 모텔이 나오거든. 아니, 내가 모텔을 다녀봐서 아는 게 아니라 거기 가는 길을 설명하려면 에쿠스 모텔 얘기를 해야 해. 그 모텔이 보이는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해야 노문리 가는 길이 나오거든. 내 친구네 집이 노문리에 있어. 거기 놀러 가다가 본 일이야.

일산에서 늦게 출발해서 해가 진 다음에야 양수리에 들어섰어. 에쿠스 모텔에서 우회전을 했는데, 한 십여 미터 쯤 앞에 차가 서 있더라고. 왜 안 가냐고 난 빵빵 댔지. 빨리 친구네 집에 가서 고기 구워먹을 생각에 들떠 있었거든. 그래도 앞 차가 안 가는 거야. 뭔 일인가 싶어 내려서 보니까, 앞 차가 강아지를 쳤어. 최형이 커피 같은 거 마시고 있을 수 있으니까 자세히 설명은 안 할게. 말티즈가 차에 치이면 어떻게 될지 그냥 상상해 봐. 말티즈는 깨갱, 소리도 못 내고 바로 요단강을 건너버린 거야.

강아지 주인으로 보이는 아줌마가 옆에 있었는데, 난 그때 사람이 울면 영혼이 쏟아진다는 걸 알게 되었어. 아줌마가 바닥에 달라붙은 말티즈를 떼어내서는 품에 안더라고. 그러고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계속 울면서 말티즈 안고 걸어가더라. 기억해둬. 이게 A타입 이별이야.

B타입 이별은, 이란 프로그램에서 <도시의 개>라는 다큐를 한 적이 있거든.(안 봤으면 울고 싶은 날 한 번 봐봐.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어.) 거기에 강아지를 버리고 가는 아줌마 얘기가 나와. 어떤 아줌마가 차에다 강아지를 싣고 와서는, 고속도로 근처 공장에다 버려. 공장에 CCTV가 설치되어 있다는 걸 아줌마는 몰랐던 거지. 강아지를 공장 입구에 묶어 놓고 아줌마는 차로 돌아가. 아주 명랑해. 떠나기 직전엔 잘 지내라고 강아지에게 손까지 흔들어 줘. 이게 B타입 이별이야.

1.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니?

구(舊)여친이, 이젠 가슴도 뛰지 않고 설레지도 않으며, 마음속에 겨우 남은 미안함 하나 때문에 계속 만나는 건 아닌 것 같다면서 떠나갔다고? 헤어지기 직전 두 달 간은 구여친이 무덤덤하게 반응하고, 대놓고 마음이 식은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고? 가슴 무너지겠지만 받아들여. 그건 B타입이야. 유기(遺棄)지.

“대체 제가 뭘 잘못했기에 저에게 이러는 걸까요?”

꼭 뭘 잘못하지 않아도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고. 내 친구가 얼마 전에 아이패드를 중고로 팔아버린 것과 비슷한 거야. 그 친구는 아이폰이랑 맥북도 가지고 있는데, 가지고 다닐 때는 아이폰을, 뭔가 작업을 할 때에는 맥북을 쓴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중간에 낀 아이패드는 방치되어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거지. 아이패드에 뭔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 분명 아닌데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난 최형의 구여친에게 아이폰 같은 존재가 ‘학교 동기’라고 생각해.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같이 어울리고, 술자리도 자주 갖는 사람들은 그냥 늘 옆에 있는 존재가 된 거지. 맥북 같은 존재는 ‘같은 수업 듣는 오빠’야. 남자친구에게 느껴야 할 감정들을, 최형의 구여친은 그 ‘오빠’한테 느끼고 있었잖아.

지난주에 어떤 독자 분이 댓글을 남겨주셨더라고. 남자인데, 여자친구와 연애하는 중에 다른 사람과의 대인관계를 위해 최선을 다 하는 게 여자친구에게 미안해해야 할 일이냐는 질문이었어. 난 미안해 할 것 까진 없는데, 연애와 대인관계가 같은 동력으로 돌아가는 일이라 좀 주의해야 한다는 답글을 달았지. 최형의 구여친은 그 부분에서 실패한 것 같아. 연애엔 별로 열심을 내지 않아도 알아서 돌아가니, 다른 쪽 대인관계에 열을 내기 시작한 거지. 이건 아래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고.

여하튼 이걸 너무 거창하게 생각해서 “대체 어떻게 제게 이럴 수 있는 건가요? 구여친의 심리는 뭔가요?”라며 열을 내진 마. 그런 일은 저녁 뉴스만 봐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어. 인생을 B타입으로 사는 사람들이 매일 뉴스에 빠짐없이 나오거든. 삶이나 타자(他者)에게 애정을 착상시키지 못하는 사람들.

그걸 A타입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답을 구하려고 하니까 답이 나오질 않는 거야. 최형은 조각난 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연애를 안고 울며 걸어가는데, 구여친은 어쩜 그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최형도 모르는 사이에 구여친은 언젠가 연애를 유기했을 거야. 언제 어디에다 버렸는지는 구여친만 알겠지. 그런 후에는 최형을 유기했지. 다시 돌아가는 길을 물으려 최형은 내게 메일을 보냈어. 그런데 난 미안하게도 이런 답장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그건 잃어버린 게 아니라, 버린 거라는 답장을.

2. 온 힘 다해서 사랑하고 헌신한 게 죄야?

나 그, <논어>에서 ‘과유불급’ 설명하는 부분 참 좋아 하거든. 원문을 그냥 갖다 붙이면 너무 지루하니까 연애에 대입해서 카톡체(응?)로 옮겨볼게.

자공 – 사(師)랑 상(商) 중에 누가 나음?
공자 – 사는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짐), 상은 철벽(철벽치고 이성을 경계함).
자공 – 그럼 사가 나음?
공자 – 노노. 금사빠나 철벽이나 쌤쌤.

웃자고 한 소리고, 최형의 그 ‘온 힘 다한 사랑과 헌신’에 과유불급이란 빨간불이 들어왔다는 걸 말해줄게. 연인 사이에선 분명 서로의 모난 부분들을 다듬는 조율이 필요하거든. 그런데 그게 한 쪽만 일방적으로 행해지면 조율이 아냐. 조련이지.

“그녀의 ‘나는 되지만 너는 안 돼.’식의 태도 때문에 힘들었지만, 전 다 맞췄어요.”

매뉴얼을 통해 질리도록 얘기했잖아. 영화 부당거래의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아요.”라는 대사도 소개했고, 자동기어는 수동기어에 비해 손길을 받을 일이 적다는 얘기도 했고, 알아서 풀을 잘 뜯는 양 보다 길 잃은 양에게 더욱 관심이 간다는 얘기도 했고, 이런 얘길 또 해야 해? 지난주 목요일에도 ‘아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다 해주고 싶어 차키까지 내주는 아빠’ 얘기를 했잖아. “상대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다 받아 주곤 그게 지고지순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대원들이 있어서 가슴이 아프다.”는 얘기까지 했는데, 최형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곤란해진다니까?

최형. 앞으로 누군가를 다시 만나 연애를 하더라도, 나중에 억울하고 후회될 것 같으면 선물이든 헌신이든 하지 마. 그렇게 해야만 관계가 유지될 것 같아서 한 행동들, 또 훗날 어떤 형태로든 보상을 받기 원하며 한 행동들은 기억에 남는 법이거든. 그건 상대를 위해서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최형 자신을 위해서 한 행동일 뿐이야. 그런 호의를 받는 상대 역시 명절이면 으레 받는 보너스를 받은 느낌밖에 갖지 못하는 것이고 말이야. 기쁘기야 하겠지만, 감동할 정도는 아니잖아. 보너스 액수를 늘린다고 기쁨이 감동으로 변할까?

아, 그리고 꼭 하나 말하고 싶은 게 또 있어. 최형이 한다는 ‘헌신’은, 너무 여성스러워. 일반적인 헌신과 달리 가정부 느낌이 좀 많이 나. 생필품 챙기고, 집안 일 도와주고, 방청소 해주고, 뭐 그런 일들 말이야. 그건 ‘여자친구가 내게 해줬으면 좋을 것 같은 일들’인데, 최형은 그걸 그대로 여자친구에게 해주고 있어. 애교부리고 매달리고 그러는 일들까지. 요즘 같은 시대에 무슨 그런 구분을 짓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는데, 난 이게 분명히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 남자가 ‘남자다운 모습’을 가지는 거 말야. 박력 없이 세심하기만 한 남자는 회전목마 같거든.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봐.

3. 내가 어떻게 해야 돌아올 거니?

우선, 구여친이 현재 만나고 있다는 그 남자도 ‘진짜’라는 걸 최형에게 말해주고 싶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여친이 누군가를 만난다고 하면 그 상대를 정말 가볍게 생각하거든. 자신과 구여친의 관계는 ‘본편’이라 생각하고, 그 사람과 구여친의 관계는 ‘번외편’ 정도로 생각하지. 구여친이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서 애 낳고 사는데, 자신이 전화 한 통만 하면 구여친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는 남자들도 있을 정도야. 심각하지. 이건 뭐 약도 없어.

“누군가를 만나서 다시 연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더니, 다른 남자를 만나더군요.”

최형. 헤어질 때 하는 얘기는, 내 친구 Y군이 술을 끊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비슷한 거야. 그 순간엔 진심이지. 그런데 진심이라고 다가 아니라니까? 난 개인적으로 마음이 손처럼 생겼을 거라 생각해. 손에 손가락이 있는 것처럼 마음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을 거라고 봐. 난 손가락 중에서 검지를 제일 자유롭게 사용하는데, 마음에도 그 검지와 비슷한 부분이 있을 거야. 다짐을 할 때에는 검지 같은 그 부분의 마음으로 한 거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엄지나 중지 같은 부분의 마음이 고개를 들어. 그럼 또 그 마음으로 무언가를 저질러 버리고 마는 거야. 지금 나를 자극하는 가장 강렬한 그 대상에 마음을 쏟는 거지.

그럴 때 엄지나 중지 부분의 마음이 검지 부분의 마음을 바라보며 부끄러워하는 감정을 죄책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풀어 놓으면 얘기가 너무 길어지니 이쯤에서 생략할게. 여하튼 우리, 유효기간 지난 상대의 다짐을 붙잡고 매달리진 말자.

“그냥 아무 남자나 만나기로 한 것 같아요.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난 연애의 유기는 진작 일어났다고 봐. 구여친이 최형과의 만남에 집중하지 않고 최형의 표현에 무덤덤하게 반응했을 때, 이미 그때는 유기가 벌어지고 난 뒤야. 두 달 전쯤에 말이야. 그 후엔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버텨온 거지. 그러다가 그것마저 무뎌지는 시기가 왔고, 결국 이별통보를 한 거지.

구여친에게 전화 걸어서 “그 오빠를 보면 설레고, 함께 있으면 행복해.”라는 얘기를 듣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혼자 가슴 치며 우는 일은 그만뒀으면 좋겠어. 자학이잖아. ‘그래, 이번 통화를 계기로 다시 한 번….’이라는 생각으로 전화를 걸지만, 끊고 나면 분노와 실망감과 배신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오지? 그게 상처에 난 딱지 뜯는 거랑 비슷한 거야. 자꾸 그러면 낫질 않아. 가까이 살면 내가 후시딘이라도 발라줄 텐데, 하아, 말로만 위로해서 미안해 최형.

우리, 최악의 상황만 피하자. 앞으로 최형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상대에게 ‘정류장 같은 남자’가 되는 거거든. 버스를 타기 전에 정류장을 거치는 것처럼, 상대는 한 연애가 끝나고 다른 연애가 시작되기 전에 최형에게 찾아올 수 있어. 마음이 아직 남아있을 때 상대가 그런 식으로 찾아오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거의 받아주더라고. 친구 비스무리한 관계로 지내는 건데,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고백하면 상대는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라며 거절하지. 최형의 구여친에게 그럴 조짐이 좀 보여. 차분하게 긴 시간 통화한 것도 그렇고, 만나는 남자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한 것도 그렇고, 이제 친구처럼 편하게 보는 사이가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 한 것도 좀 그래. 설렘에 대한 충족은 그 남자에게서 해결하고, 남은 자잘한 감정해소는 최형에게 하는 느낌이야.

최형은 그저 다시 통화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희망으로 한껏 부푼 것 같은데, 그거 헛바람일 가능성이 99.98%야. 수많은 대원들이, 자신이 바로 나머지 0.02%라고 생각하며 매달리지. 0.02%가 되려면 우선 마음의 거리를 둬야 한다는 걸 모른 채 말이야. 겁쟁이들이나 하는 ‘차단’ 같은 거 하지 말고 지금의 거리에 점점 익숙해지길 권할게. 자유로움이든 후회든 설렘이든 상대가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게 그냥 둬 보자고. 최형이 유기당한 그 곳, 거기서부터 다시 잘 먹고 잘 자면서 시작해야해. 버리고 간 사람 찾겠다며 달려갔다간 길을 잃을 수 있으니, 달려가지 말고 바로 그곳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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