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터펀쳐에게 온전히 그의 것인 단 한 순간을 준다면 무엇을 해낼 수 있는가.

경기가 시작되자 서로가 준비한 것들이 링 위로 꺼내져 나왔다. 파퀴아오가 준비한 것은 리드 레프트 핸드 이후 밑으로 빠져나오는 탈출 경로, 그리고 다시 되살려낸 상체 무브먼트였다. 마르케즈는 아직 꺼내놓지 못했다.

사실 그보다 더 눈에 들어온 것은 파퀴아오의 앞발이었다. 마치 전성기를 연상시키듯 앞발이 자유자재로 풋워크를 조절하며 브레이크를 걸었다가 엑셀을 밟는데 파퀴아오의 공격이 자신의 안전 지대에서 벌어지듯이 일어나는 것이다. 파퀴아오의 몸이 두터워졌다는 게 보이지만 밸런스가 겸비되니 더욱 더 효과적인 무기가 되었다. 어퍼컷을 연마했는지 마르케즈가 접근해 오자 근접한 거리에서 어퍼컷을 때리고 빠져나갔다. 앞손이 떨어져 있는 위험이 보이지만 그것은 도리어 어퍼 바디 무브먼트를 막기 위함이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건 볼 수가 있다. 이런 생각이었을 터다.

마르케즈는 펀치에 반응하지 못했다. 보다 좋은 표현을 찾기 어려워 모호한 말을 덧붙이자면, 부드러움이 사라졌다는 게 내 표현이겠다. 예전에는 부드럽게 상대 공격을 받아넘기고 자신의 공격을 강력하게 전달했다면, 지금은 뻣뻣함이 드세어 파퀴아오가 펀치를 전달하고자 할 때 받아넘기지 못했다는 것이 보였다.

파퀴아오가 페이스를 주도하는 와중에, 마르케즈는 포지션 싸움에서 활로를 찾으려 시도했다. 내 앞발을 상대의 앞발 바깥으로. 그걸 실천하면서 타이밍을 읽고자 하는데 파퀴아오는 밸런스를 앞세워 원할 때 펀치를 갖다 맞추었다. 불리한 포지션을 능가하는 속도. 마르케즈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매니 파퀴아오가 자신의 생각보다 더 빨랐던 걸까?

1, 2라운드는 파퀴아오에게 갔다. 20-18 파퀴아오.

3라운드 들어 마르케즈가 선공을 가한다. 앞손 레프트 훅을 오버핸드로 휘두르는데 그게 맞아 들어갔다. 사실 그 펀치가 맞아들어가는 것, 그 원인은 앞발 싸움 때문이지만 파퀴아오는 앞발 싸움으로 시간을 끌 생각이 없다. 파퀴아오는 여전히 좋은 컨디션을 앞세워 한 발 맞추고 빠져나가는 식의 경기를 유지한다.

잠시 파퀴아오가 집중력을 잃었다. 서서히 다시 밸런스가 흐트러지고, 상체를 계속 움직여 줘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 순간, 마르케즈가 페인트를 주고 거대한 오함마 라이트를 걸어버렸다. 파퀴아오는 어퍼 바디 무브먼트로 생각했겠으나 그 순간 마르케즈의 오버핸드 라이트가 정확히 꽂혔고 파퀴아오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모슬리 전 같은 이상한 다운을 제외하면 이게 몇 년 만인가.

마르케즈가 맛이 간 파퀴아오에게 콤비네이션을 던지려고 하는데 파퀴아오는 아예 맞불을 놓는다. 마르케즈가 그 순간에도 포지션에서 우위를 가져가려고 하는데 파퀴아오 역시 마찬가지다. 풋워크와 서클링이 난무하고 펀치가 그 위를 수놓는다. 아마 제일 치열했던 순간이 아닌가 싶다.

3라운드만에 마르케즈가 동점을 만들었다. 28-28 even.

이제 상황은 파퀴아오에게 오히려 불리하다. 마르케즈는 다운을 여러 번 경험해 보았지만 파퀴아오는 다운에 대한 경험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파퀴아오가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데 마르케즈가 생각보다 적극적인 공격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뒤이을 함정의 전조였다면 마르케즈는 정말로 대단한 선수다.

정상 궤도를 찾은 파퀴아오가 3차전을 연상시키며 성급하게 지대를 잠식해 가는데 마르케즈가 갖다 맞출 수 있게 해 준다. 스텝도 다시 가드도 다시, 3차전처럼 스텝도 커지고 가드 역시 트라이앵글 가드가 되어버렸다. 둘 다 힘이 떨어져 보인다. 둘 중에 누가 체력이 없어 보이는가 생각해 봤는데 마르케즈라는 느낌을 받았다. 4라운드는 아주 아슬아슬했는데 파퀴아오에게 주었다. 마르케즈가 라운드를 주도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해서이다.

둘이 쉬는 와중 HBO가 3차전과 4차전의 4라운드까지의 파워 샷 랜디드를 보여주는데 둘이 모두 같다. 25-25, 34-34. 전반적으로 4차전이 정타가 훨씬 많이 터져나왔다.

5라운드 들어서 파퀴아오가 상체 무브먼트를 회복하고 마르케즈도 상체 움직임이 좋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파퀴아오는 페인트로 상체를 흔들어주고 마르케즈는 파퀴아오가 공격해 올 때 상체를 자신의 좌반면으로 움직이는 전략을 가져가고 있다. (메모를 옮겨 적는 지금 넉아웃 샷이 갑자기 떠오른다)

팩이 정상적인 컨디션을 가져가자 2라운드를 연상시키는 레프트 핸드가 발동이 걸렸다. 그런데 예상외로, 레프트 핸드에 정타를 얻어맞은 마르케즈가 다운당하고 말았다. 일어난 마르케즈의 얼굴을 카메라가 비추는데 벌써 온통 붓고 피가 솟는다.

둘 다 초반에 모든 걸 걸었는가를 의심하게 만든다. 파퀴아오가 마르케즈를 끝장낼 기회를 잡았다는 듯 몰아붙이는데 마르케즈 다리가 맛이 갔다. HBO 시계는 37초가 남았음을 보여주는데 시간이 아직 길다. 파퀴아오가 마르케즈를 정신없이 밀어붙이고 그 와중에 마르케즈가 정타를 연거푸 얻어맞는다. 나는 마이클 캣시디스 전 때도, 후안 디아즈 전 때도 후안 마뉴엘이 위험에 빠졌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인데 마르케즈가 이토록 위험해 보였던 적이 없다. 하지만 온 몸이 자신의 위기를 말할 때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데도 펀치를 내는 것은 마르케즈가 그 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물러서 본 적이 없다.

파퀴아오가 마침내 마르케즈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몰아붙이는데 파퀴아오가 이토록 간절하게 펀치를 뻗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공이 울렸다. 마르케즈가 버텨냈다. 코너로 돌아오는 마르케즈 얼굴에 피가 철철 흐르고 있다. 5라운드까지,

48-45 파퀴아오. 판정까지 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6라운드, 파퀴아오가 빨리 끝내고 싶어한다. 9라운드 이전 경기를 끝내고 싶어한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둘 다 이미 클래스가 역대급을 논하는 복서이지만 둘이 만나니 야수 둘이다. 파퀴아오가 정타를 점점 맞추고 있는 것이 보인다. 마르케즈가 정타를 지금까지의 트릴로지에 비해 너무 많이 맞고 있다. 파퀴아오가 지금 경기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파퀴아오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케즈가 경로를 찾았다. 좌반면으로 몸을 기울이며 라이트를 전달한다. 하지만 그런 샷에도 불구하고, 파퀴아오가 자신감을 가졌고 그가 성급하게 들어갔다. 계시원이 10초 남았음을 알리는데 파퀴아오가 마르케즈를 링 줄 언저리에서 계속 붙잡고 있다. 파퀴아오가 페인트 이후 원투를 치는데 마르케즈가 빠져나온다. 그리고 파퀴아오가 쓰러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

HBO 카메라는 이후 마르케즈가 어떤 샷을 던졌는지 카메라로 보여 주었다. 파퀴아오가 한 번 발을 구르고 마르케즈에게 들어가는데 그 순간 마르케즈의 얼굴이 차분해지고 상체를 좌반면으로 기울이며 도끼 같은 라이트를 걸었다. 파퀴아오가 쓰러져 텐 카운트가 아니라 30초를 세어도 일어나지 못했다. 모든 부심들이 47-46 파퀴아오를 매기는 와중에 그와 상관없이 경기가 끝났다.

해설을 하던 로이 존스가 안토니오 타버 2차전이 떠올렸을 것이란 생각을 잠시 했다. 링사이드에서 구경하던 마르티네즈는 폴 윌리엄스 2차전을 떠올렸을 것 같고. 난 정말 파퀴아오가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파퀴아오가 순간 집중력을 잃었고 예의 그 페인트 후 원투가 들어가는 순간, 그 순간 그 시간은 온전히 마르케즈의 것이 되었다. 도대체 그런 라이트는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되새김질을 해야 나올 수 있는가. 1차전에서 자신을 다운시켰던 원투를 몇 번이나 돌려 보며 자신의 대처방법을 떠올려야 그런 펀치를 그 순간에 던질 수 있는가.

파퀴아오와의 경기에서 마르케즈는 늙었고 모든 시간을 파퀴아오에게 빼앗겼다. 하지만 그 수많은 시간 중 몇 초가 그에게 주어졌고, 파퀴아오에게 복수를 맹세하고 자신이 받아야 할 댓가를 받겠다는 히스패닉 복서는 그 순간 자신이 계속해서 그리던 펀치를 마침내 그려냈다.

3차전 이후 4차전을 주장하는 마르케즈를 보면서, 3차전 보다 더 나쁜 경기를 할 것이라면 무엇하러 4차전으로 돌진하는지, 그 경기에서 이겨 봐야 뭐가 바뀌겠는가라고 주장했던 나에게 펀치를 던지는 것 같았다. 마르케즈에게 진정으로 중요했던 것은 돈이나 명성이 아니라 파퀴아오를 언젠가 한 번 무너트리겠다고 했던 자기 자신이 아니었을까.

나는 파퀴아오를 이기기 위해 태어났다. 마르케즈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고, 마침내 그것을 증명했다.

많은 것을 생각하진 않지만, 넉아웃 오브 더 이어, 파이트 오브 더 이어, 라운드 오브 더 이어를 전부 다 팩-마르케즈 4차전이 쓸어간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늘 인터넷으로 시청했지만, 현지에서 경기장을 가는 것이 부러웠던 적은 없었는데 오늘은 그렇다. 오늘 경기장에 있던 미트 롬니, 레이 레너드, 서지오 마르티네즈, 매직 존슨에게 잊지 못할 순간이 되길 바란다.

***

이번 경기를 앞두고 나는 파퀴아오의 커리어에 종말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파퀴아오 팬이었고 파퀴아오가 지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놀란 것은 마르케즈를 내가 정말 좋아했다는 것이다. 5라운드 팩이 마르케즈를 다운시키고 마르케즈 얼굴을 카메라가 클로즈-업 하는데 마르케즈 얼굴에 맺힌 주름살을 보면서 서글픈 감정을 느꼈다. 팩이 마르케즈를 끝장내려고 몰아붙일 때는 마르케즈가 버텨내기를 바랬다.

하지만 파퀴아오가 죽음과 같은 상태가 되어버리자, 내 기분은 더 가라앉고 말았다. 결국 나는 둘이 이번에도 손 잡고 48라운드를 끝마치길 바랬던 것 같다.

이제 파퀴아오의 위치가 어떻게 될 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후안 마뉴엘 마르케즈가 역대 올 타임에서 살바도르 산체스는 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평안하게 은퇴하십시오 후안 마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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